방명록

1. 환영합니다!

2. Wojciech는 가장 오래된 슬라브어 이름 중 하나로서 특히 폴란드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woj'는 전쟁을 의미하고 'ciech'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3. 주로 중부 유럽, 발칸 반도 등 구 동유럽 공산권의 언론 기사들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최근에는 종교, 특히 이슬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4. 정치 성향은 보수 우파에 가깝습니다. 

5. 제 포스팅에 관한 문의, 반론을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다만 인신 공격이나 욕설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대체역사 : 화복(華復)작전 대체 역사 : 1960년대

주의: 이건 어디까지나 대체역사관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가 아니라는 거지요. 진지하게 믿으면 절대 안됩니다. 중간에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섞여있으나 사건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넣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가짜이니 이 점 명심하여주시기 바랍니다.

抢救文物, 實行北伐
(창구문물, 실행북벌)

"문물을 구함으로써 북벌을 실행한다."
- 장개석, 1967년 -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의 남쪽 절반에서 비로소 절대 권력을 확립한 장개석 총통은 대륙 절반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감에 차 있었다. 분단 직후 중화민국은 4억 인구를 기반으로 고도 성장을 이룩해 극빈 상태에서 탈출했으며 단숨에 일본을 제치고 (소련을 제외한)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6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독일 경제를 제친다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이때는 북중국이 UN에 신규가입하기 이전(1971년)이라 자유 진영 사이에서는 남중국, 즉 중화민국만이 중국 대륙이 유일한 정통 계승자로 인정되었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핵무기까지 보유한 상태였다. 

국내적으로는 20년 가까이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중국 대륙 남부 전역에 시행한 계엄령을 유지하면서 사회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삼민주의, 유교, 불교 그리고 청교도적 도덕관에 입각한 도덕 엄숙주의와 반공주의를 사회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반면에 북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극빈 상태 탈출은 고사하고 수천만명이 굶어죽는 참극이 벌어졌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북중국을 떠나 남중국으로 향하는 등 남중국 체제의 우월성은 북중국 정권 성립 10여년만에 증명되었다.
 
5~60년대 내내 장개석이 관심을 쏟은 사안은 재북벌 시도였다. 장개석은 1950년 당시 중공군이 한반도에 전력을 투입한 사이 북중국 재수복을 위한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던 것을 최대의 아쉬움으로 삼고 있었다. 1949년 당시는 산동성과 섬서성까지 국민당군이 밀렸으며 전력 정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산군이 다시 침공하면 본토 전체를 상실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공세적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고 그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어버린 것이었다. 50년대 내내 하남성과 서안, 감숙 등 남북 경계선에서 간헐적인 교전이 이루어진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64년 핵개발 완료 이후에는 북중국에 대한 선제적인 핵공격 방안이 마련된 적도 있었다. 북평에 전격적으로 핵무기를 투하해 지휘부를 몰살시키는 소위 참수 작전을 실행해 구심점을 잃은 공산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 미군과 협조해 황하강 이북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북중국도 마찬가지로 핵무기를 보유한 탓에 자칫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 및 협조 거부와 핵무기 개발로 인한 (남)중미관계의 급격한 악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같은 해부터 미국과는 독자적으로 남중국이 월남에 개입하고(미국과의 공조가 있었으나 악화된 중미관계 탓에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함)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월남전의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북중국에 대한 전면 핵공격 계획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당시 장경국에게 권력이 이양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개석은 '북평(북경)과 개봉에 원폭을 떨어뜨리면 중화문명을 수호한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중화 문명의 유산을 파괴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당 계획을 거부했다.

이러한 와중에 1966년 북중국에서 소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북중국 전역에서 문화재에 대한 반달리즘 행위들이 벌어지고 만다. 이 당시 고령으로 인한 퇴임을 앞두던 장개석은 문혁으로 인한 북중국의 대혼란을 재통일을 이룩할 좋은 기회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북중국 지역의 문화재들이 파괴되는 현상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1949년 당시 국민당은 자금성 박물관에 있던 유물들을 남경으로 피신시켰고 민간 차원에서도 부호들이 대륙 남부로 피신하면서 유물들을 들고 온 일은 있었으나 아직 상당수의 귀한 유물들이 북부 지방에 많이 남아있었다. 북경은 명청대 유적(건축물)의 중심이었으며 산동성은 공자의 탄생지, 북하남성에는 은허(안양)와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이 위치해있었으며 특히 은허에는 신규 발굴된 갑골 문자와 은나라 유물들이 있었다. 또한 산서성에는 운강 석굴, 감숙성에는 돈황 석굴과 천불동 계곡 등의 불교 유적 및 미술품, 유물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모두 홍위병에 의해 파괴될 것임이 자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은 문물 보호가 우선이라고 판단했으며 건축물은 어쩔 수 었더라도 들고 올 수 있는 유물들은 남중국으로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북중국이 순순하게 유물을 내 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남중국으로 유물들을 가져와 중화 문물의 파괴를 막고 중화 문물을 수복한다는 소위 '화복 작전'이 실행되었다. 1949년 이후 20년 만에 다시 시작된 희대의 유물 피신 행위, 혹은 도둑질이었던 것이었다. 

-계속-

2018년 새해 기타


작년에는 매우 '빨갱이'스러운 선동 곡을 올렸었는데 오늘은 그보다는 훨씬 좋은 곡을 하나 올려드립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명천회갱호입니다. 1985년에 대만에서 발표되었고 영웅본색에도 수록되었지요.

송자호가 재키에게 테이프를 거내는 자리 바로 옆에서 어린이 합창단이 부르고 있었던 바로 그 곡입니다.

 

한해가 가고 3시간 후에 무술년이 옵니다. 물론 어차피 작년에도 그랬고 내년 오늘 또 똑같은 소리를 하겠지만 

그래도 한 해가 가면 아쉬우면서 동시에 기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절이 하 수상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아주 어수선했던 한해였습니다. 

사실 내년에도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별로 좋아질 것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명천회갱호의 가사처럼 내일은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고 한번 믿어보고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대체역사 : 조선족의 오늘 대체 역사 : 2010년대

주의: 이건 어디까지나 대체역사관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가 아니라는 거지요. 진지하게 믿으면 절대 안됩니다. 중간에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섞여있으나 사건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넣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가짜이니 이 점 명심하여주시기 바랍니다.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해온 왕조의 이름은 조선이었고 이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 특히 중국 대륙과 일본에서는 한국인을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경향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분단되고 대한민국의 영향으로 '한국'이라는 명칭이 통용되면서 조금 달라졌다. 본래 중국에서는 인종적인 한국인을 '조선인',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분단 이후 중화민국, 즉 남중국은 대한민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중화인민공화국, 즉 북중국은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 체제에 따라 한민족을 통용하는 명칭도 달라졌다. 남중국에서는 한민족을 통상 한족(韓族)이라 부르고 북중국에서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고착화되어 북한이 붕괴되고 대한민국 주도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 진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북중국에서는 자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조선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통상 남중국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자 내지, 한민족을 재중교포, 재중동포라 부르는 반면 북중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조선족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는 통상적인 개념이지 정확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북중국 출신이라도 남중국으로 넘어온 한민족에 대해서 조선족, 재중동포 모든 단어가 통용된다. 

일반적으로는 1990년대 한-북중 수교 이전 북중국에서 남중국으로 넘어온 한민족, 혹은 대한민국 국적자였다가 남중국으로 이주한 한국인은 재중동포, 재중교포라고 부르며 90년대 이후 남중국이나 한반도(구 남한, 구 북한 모두 포함)로 넘어오거나 북중국에 계속 머무르는 한민족은 조선족이라 부른다. 본 파트에서는 이 모든 한민족을 편의상 조선족이라 지칭하며 대한민국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온 한국인보다는 북중국 출신의 한민족을 중점으로 설명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소위 동북 3성(길림, 흑룡강, 요녕)이 조선족의 주요 출신지이며 한반도 본가는 주로 함경도, 평안도지만 구 남한 지역(경상도, 전라도 등) 출신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다음은 국가 별 현황.

1. 중화민국(남중국)
중국 대륙이 분단되면서 조선족 대부분은 한동안은 공산화된 만주 지역에 그대로 남았다. 이는 1958년 북중국에서 대약진 운동이 벌어지면서 조금 달라지는데 남북 국경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음성적인 경로로 남중국의 발전상이 일부 이지역으로 전해진 것이다. 당시 산동성, 북하남성, 섬서성 인근 주민들이 굶주림을 피해 남중국으로 도망쳤고 공업이 발달해있던 동북 3성조차 중국인들이 1000KM 이상을 걸어 남중국으로 도망친 사례가 300만명을 넘을 정도로 굉장히 많았다. 약 4년 간 1000만명이 넘는 북중국인들이 북중국에서 도망왔는데 이는 당시 북중국 인구의 4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이들 중에는 만주족 내지 몽골족등의 소수 민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소수민족에는 조선족들도 있는 것이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조선족 약 30만명이 남중국으로 탈출하여 정착하게 된다. 2017년 현재 탈북 조선족 출신 내지 그들의 후손인 재중 동포는 약 5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중 소수는 대한민국으로 이주하기도 했으나 60년대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열악한 이유로 절대 다수는 남중국에 정착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은 60년대 이후 남한에서 남중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과 함께 통상 재중 교포, 내지 재중동포로 불린다. 이들 대부분은 남경과 상해 등의 강소성 일대에 주로 모여 살며 광동성, 사천성에도 적지 않은 수가 살고 있다. 이들은 반공 성향이 매우 강하며 국민당이 주요 지지 정당이다. 이들 중에서는 기업가, 입법원 의원도 상당수 배출되었으며 사업가 중에는 일본의 ****크나 *데와 비슷하게 모국인 한국에 기업 지부를 세워 활발한 경영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한반도(대한민국)
70년대 후반 북중국도 결국에는 개혁 개방 및 시장 경제 도입으로 돌아서면서 북중국에 남아있던 상당수의 조선족들도 큰 변화를 겪으며 시장 경제에 적응해야 했다. 20년 가까이 새로이 시장 경제 속에서 생존 노력을 해야 했던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90년대 초반 대한민국이 북중국과 수교하면서 양중 동시 수교를 완수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으로 노동자 내지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수교 이상으로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은 90년대 후반이었다. 바로 북한 정권이붕괴되고 한반도가 통일 된 것. 당시 50년 넘게 남북한 간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통일은 남한인들로 하여금 효과적인 구 북한 지역 통치 및 구 북한 지역 주민들과의 효과적인 소통, 그리고 경제 복구를 고민해야 하게 만들었는데 조선족들은 북한 지역 주민들과 꽤 교류해왔고 시장 경제에 어느 정도 적응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할로서 적임이었던 것. 

한국 중앙 정부와 구 북한 지역의 자치 정부, 그리고 북한 지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 및 기타 업체들은 조선족들을 일종의 중간 관리자로 대거 고용했다. 남한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족 뿐만 아니라 북중국에 잔류한 조선족들에게도 비자 발급 요건을 완화하고 국적을 쉽게 얻게 해주면서 조선족들이 자연스럽게 구 북한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곧 구 북한 지역에서 중요한 실세 역할로 등극하였다. 20년 가까이 지나면서 피고용인 신분에서 벗어나 실제로 기업을 차린 사례도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은 구 북한 지역 출신 주민들보다 더 시장 경제에 해박했기에 적응이 빨랐고 엄청난 개발 바람에 잘 편승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구 북한 지역에서 자생한 중견 기업들의 상당수는 조선족 출신들이 세운 기업들이며 구 북한 출신 주민들이 세운 기업은 아직도 중소 기업 수준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매우 적은 편이다. 

현재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한반도이며 구 남한 지역에 50만명, 구 북한 지역에 11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평양, 원산, 나진, 함흥, 신의주 등 주로 광역시 권역에 주로 살며 구 북한 지역만을 한정 할시 이들의 대부분은 중산층,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 전체로 봤을 때는 구 남한 지역 출신 주민들에 비해 경제 수준이 떨어지는 편. 이들 대부분은 상당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상태이다. 단 임시적으로 남북한 거주 이전의 자유에(여행, 이동의 자유에는 제약 X) 제약이 있는 상태이고 이들은 구 북한 지역을 거주지로 등록했기에 구 남한 지역으로의 거주지 이동은 약간의 제약이 있다. 이는 구 남한 지역 주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한반도의 조선족은 구 남한 지역 주민들과 구 북한 지역 주민들과의 교류에서 일종의 중개자 역할을 해 두 주민들 간의 간극을 좁혀주며 한국-북중간 경제 교류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구 북한 지역에서의 주도적인 자리를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구 북한 지역 출신 주민들의 계층 상승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 북한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에서 1등 시민은 남조선인이고 1.5등 시민은 중국조선족이며 3등 시민은 우리 북조선인들이다."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 실제로 구 북한 지역 주민들의 조선족들에 대한 적개심은 상당히 강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통일 한반도 구성원 간 갈등 해소에 장애물이 되고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어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중앙정부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3. 중화인민공화국(북중국)
중국 대륙 전체에서 지난 수십년동안 가장 드라마틱하게 인구 감소를 겪은 소수 민족 중 하나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분단 당시 약 22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조선족은 현재 북중국에서는 불과 3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5~60년대에 1차로, 90년대 이후 2차로 절대 다수가 남중국 내지, 한국(한반도 전체)으로 이주했기 때문. 특히 분리 독립 움직임을 아예 초기에 제거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조선족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국적 포기를 종용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움직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한족이며 곧 자치주의 지위도 박탈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티베트인들이 많이 살던 청해성의 경우도 5~60년대에 티베트인들의 절대 다수가 티베트 본토로 이주했으며 지금은 90퍼센트 이상이 한족이다. 
* 티베트인,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감숙성, 영화회족 자치구 인근의 회족도 이슬람 탄압을 피해 상당수 남중국으로 이주. 여기에 대한 설정은 추후 포스팅에서 다룰 예정.

대체역사 : 유럽, 중앙아시아 개발원조은행 (2) 대체 역사 : 1990년대

주의: 이건 어디까지나 대체역사관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가 아니라는 거지요. 진지하게 믿으면 절대 안됩니다. 중간에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섞여있으나 사건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넣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가짜이니 이 점 명심하여주시기 바랍니다.

4. 주요 성과

"1992년 이후 25년 간 러시아가 이루어낸 성과는 소련이 74년 간 이룬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역사상 최초로 모든 러시아 국민들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굶어죽지 않았지만 삶은 백색 종이와도 같이 무미건조했으며 자유도 없었다. 지금은 굶어죽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선택권이 부여되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성과는 러시아인들의 근면 덕분에 가능했던 일인데 ЕБСР(Европейский Банк Содействия Развитию)의 역할 또한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보리스 넴초프 러시아 대통령 (2016~)-
* 넴초프 대통령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7년 11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럽 공동체 정상 회의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두 은행의 설립에 따른 개발 사업 및 원조 결과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불안이 방지되고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빠르게 자본주의 체제를 안착시키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동유럽 국가의 대부분이 2000년대 중반 들어서 선진국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었으며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탈바꿈하는 성과가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경우 카자흐스탄을 제외하면 고소득 국가 군으로 올라선 국가가 없기에 성과가 미미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내륙국으로서 경제 발전에 있어 불리함이 크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극빈국에서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해당 국가들의 경제력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동유럽과 달리 중앙아시아는 경제 수준 향상이 정치적 민주화로 연결되지 못했으며 독재자들의 정치 수명을 연장해주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는데 친북중에 경도되고 있는 동투르키스탄 정도를 제외하고 해당 국가들이 서방권 편입 내지 친서방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라 서방 국가들의 정계에서는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다.  

두 은행이 주관했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해당 지역들의 인프라 개선 사업이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동유럽 국가들의 SOC 개선
고속도로 건설, 철도망 개선 등의 사업으로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 절대 다수는 서유럽에 준하는 SOC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1999년 개통된 동유럽 최초의 고속철도 망인 루마니아의 '게파르트', 러시아의 '삽산'은 바로 EDAB의 도움으로 지어진 것이다. 현재 건설 중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피해 흑해에서 직접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불가리아-그리스 간 운하의 공사비도 EDAB와 세계은행의 자금에서 조달된다.
* 원래 보스포러스 해협의 선박 통과량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90년대 말부터 이스탄불 서부 외곽을 통과할 수 있게 계획 된 노선이었는데 터키의 정치적 급변 상황 등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후 터키의 몽트뢰 조약 폐기 및 보스포러스 해협 봉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안책으로 그리스-불가리아 노선이 계획되었고 키프로스 사태로 터키-서방 간 관계가 사실상 파탄난 이후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하는 흑해 연안 국가들(러시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조지아) 소속 선박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자 계획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2016년 말부터 착공에 들어갔다. 총 구간이 약 260 KM에 달하는 본 공사는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프로젝트로 평가받는다.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흑해 연안 국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피해 연안 국가들(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넓게 보면 우즈베키스탄) 도 이미 완공된 카스피해-흑해 운하를 통해 지중해로 직접 화물선을 보낼 수 있게 된다. 
** 솔직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위 프로젝트는 현실성이 많이 떨어질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조사에 따라 추후에 본 설정을 파기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ii.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 사업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하는 도로의 포장 및 철도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중앙아시아 주요 국가 도시들(알마티, 아스타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안디잔, 두샨베, 비슈케크, 위림치, 카슈가르)의 공항 인프라 현대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최초의 고속철도 시스템인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로시욥'은 CADAB의 자금으로 지어진 것이다. 카자흐스탄도 우즈베키스탄처럼 CADAB를 통해 고속철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경제성 문제(매우 넓은 국토에 비해 매우 적은 인구)로 고속철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항공 교통 확충 및 기존 노선 개선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 고속도로 개선 사업의 경우 타지키스탄 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동시에 2001년 이후 미군이 효과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증원군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 현재 아랄 해 복원 사업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CADAB 뿐만 아니라 세계 은행에서도 자금을 조달받고 있다.

5. 정치적 함의 
본 은행들의 설립은 해당 국가들의 원조 목적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서방 편입 및 미국의 영향력 확대, 보전이라는 목적도 있었기에 북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미국의 가입 권유를 거부했다. 또한 당시 버블 붕괴로 경기 침체 국면으로 접어든 남중국과 일본은 중앙아시아 시장 진출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성과를 본 측면도 있으나 경기 침체 국면을 전면적으로 되돌리지는 못했다. 

북중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기존 서방의 입김이 강하던 중앙아시아에 북중국과 터키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 중진국 수준까지 올랐다고 하나 동유럽에 비해 아직 낙후되어있는 중앙아시아는 북중국의 경제 진출 시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실제로 동투르키스탄은 점점 북중국에 경도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신규 건설 사업에 북중국 기업들이 저가를 무기로 구미 지역과 동아시아 자유 세계의 기업들을 제치고 수주를 따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여년 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빈곤 탈출 및 현대화에 큰 역할을 했던 CADAB가 이제는 어떤 역할을 해낼 지, 계속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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